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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6일 (10월 17일 목요일) 네그레이라에서 올베이로아까지 33K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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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뉴라이프교회 작성일13-1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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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청나게 힘든 날이었다. 중간 마을에 알베르게가 없어서 33km를 걸어야 했다. 13km를 걸으니 처음으로 카페가 나타났다. 나는 첫 커피를, 아내는 핫밀크를 마시고 너무 행복했다. 


 


다리를 의자에 올리고 작정하고 쉬려고 하는데 멀리서 반가운 모습이 보였다. 뉴질랜드에서 온 쟌과 게일이었다. 서로 놀란 모습으로 바라보았다. 이 빗길을  뚫고 피니스테레로 가기로 결정했냐는 격려의 눈길이었다.


 


조금 더 가니 뉴 잉글랜드에서 온 번도, 캐나다에서 온 자매도 아리조나에서 온 형제도 만났다. 모두 다 너무 반가워했다. 번은 손을 높이 들면서 피니스테레에서 카미노는 끝난다고 외쳤다. 평상시 참 조용한 사람인데 반가운 얼굴들을 만나니 그도 기분이 좋았던 모양이다. 


 


순례자는 또 각자의 길을 간다. 반가운 얼굴들이지만 다음을 기약하며 또 헤어졌다. 몇몇 순례자들이 스쳐 지나갔다. 



21km 정도를 카페도 하나 없는 작은 마을을, 아니면 마을을 먼발치에 보면서 우리는 산길을 오르락내리락해야 했다. 비가 왔다가 갰다가 하면서 우리는 판초를 벗었다 입었다 했다. 우리가 젖는 것은 괜찮은데 배낭을 젖으면 안 되기 때문에 귀찮지만 반복해서 했었다. 


 



 


피니스테레 가는 길은 하루는 꼭 33km 정도를 걸어야 4박 5일로 일정이 끝날 수 있다. 우리는 각자 조용히 걸었다. 말씀을 들으며 찬양을 들으며 각자의 기도에 들어간 것이었다. 기도만이 이 긴 길을 걸을 수 있게한다. 깊은 묵상만이 여러 가지 상념에서 벗어나게 한다. 



가는 길에 쟌 부부를 다시 만났다. 그의 신앙을 물으니 불교 신자였다는 의외의 대답을 했다. 이 부부는 35년 동안 채식주의자이다. 쟌은 67세이고, 뉴질랜드 오클랜드에 산다. 그 곳에 불교 사원이 5개 정도 있다고 했다. 그 곳에 가면 채식주의자들이 먹을 수 있는 음식을 주는데 거의 돈을 받지 않는다고 한다. 그것이 인연이 되어 불교를 믿게 되었다고 했다. 


 


그런데 카미노를 걸으면서 불교를 떨쳐버렸다고했다. 그것은 사람이 만든 종교라고 했다. 반가운 마음이었다. 예전에는 감리교인이었고 성가대원까지 했었다고 자신을 소개했다. 



카미노를 걸으면서 알게 된 것은 많은 사람이 기독교 문화 가운데 성장했음에도 미사, 의식만  중시여기는 카톨릭의 풍토에서 자라 말씀의 교육이 되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래서 크면 속수무책으로 이방 종교에 빠진다는 것이다. 


 


한국의 카톨릭의 현주소는 어디에 있는지 잘 모르겠지만 이곳에서도 미사에 참석해보면 말씀을 강론하지 않았다. 중세 암흑기에는 아예 말씀을 성도들에게 가르치지 않았던 것을 우리는 종교 개혁을 통해서 알고있다. 한국 교회에 허락하신 말씀의 풍년에 새삼 감사를 드렸다. 


 


우리 뉴라이프교회에 허락하신 말씀을 사랑하고 공부하는 영성에도 진정으로 감사를 드렸다. 어린이 성경 암송대회, 어른들 골든벨 성경퀴즈대회를 위해 기도했다.



새삼스럽지만 왜 또 걸어야 하나 생각하게 한 고된 하루였다.


 


 


 


 


 


나는 왜 이 길을 걸었나? - 정진홍 
   
800여㎞의 산티아고 가는 길을 모두 걸었다. 정확히 43일 걸렸다. 남들보다 조금은 느리지만 정직하게 한발 한발 내딛은 결과다. 그러고 보면 발이 참 무섭다.


 


생장피에드포르를 출발해 피레네산맥을 넘고 바스크와 나바라, 그리고 라 리오하 지방을 거쳐 황량한 메세타 지역을 가로질러 다시 칸타브리아 산맥을 휘감아 오르내려 갈리시아의 주도이자 성 야고보의 무덤이 있는 산티아고 대성당에 이르기까지 ‘카미노 데 산티아고’라 불리는 그 길은 분명 고통의 연속이었다.


 


단 하루도 쉬운 날이 없었다. 며칠씩 계속된 비와 눈보라, 심지어 우박과 세찬 바람에 이르기까지, 거기에 불꽃 같은 스페인의 태양마저 겹쳐지며 정말이지 더는 못 걷겠다는 탄식이 나올 즈음에야 그 날의 걷기는 끝이 나곤 했다.


 


그 덕분에 발엔 물집이 잡혀 터지고 응어리져 만신창이가 되기 일쑤였고 막바지에는 발을 땅에 디디기조차 고통스러울 정도가 됐다. 뿐만 아니라 어린애를 등에 짊어진 듯 무거운 배낭을 시종일관 지고 다니다 보니 허리를 곧추세우기도 쉽지 않았다.


 


하지만 이 길은 내게 그 고통 이상의 것을 선물해 줬다. 무엇보다도 발끝부터 머리끝까지, 심지어 내 가장 깊은 곳까지 뒤집어놓았다. 씨앗을 뿌리려면 밭을 갈아엎어야 한다. 마찬가지로 내 인생의 밭고랑을 몽땅 갈아엎은 것이 바로 이 길이었다. 그것도 바닥이 보일 만큼 깊이! 깊게 갈아엎어야 삶의 진짜 속살이 나온다. 덕분에 산티아고 가는 길을 걷는 동안 나는 실컷 울었고 내 마음의 바닥까지 내려갈 수 있었다.


 


한번은 밤을 세우며 걸은 적이 있다. 걷기 시작한 지 일주일쯤 지났을 때다. 걷고, 먹고, 자다 다시 걷는 반복된 생활이 자칫 또 하나의 매너리즘을 만드는 거 같아 그걸 한번 흔들기로 작정한 거였다. 인생이란 때로 흔들어줘야 제 맛을 낸다. 가만히 놔두면 침전물이 생기는 생과일주스나 마찬가지다. 솔직히 이국에서 초행길을, 그것도 산길을 밤에 오르는 것이 두렵고 무서웠지만 서둘지 않고 산티아고 가는 길을 뜻하는 노란색 화살표를 찾아 그것을 따라 걸었다. 밤이긴 했지만 내가 지나는 길이 광활한 밀밭을 가로질러 산으로 오르고 있음을 알았다.


 


드디어 새벽미명에 790m 높이의 페르돈고개에 닿았다. 순례자들의 철동상이 늘어서 있는 바로 그곳이었다. 나는 페르돈고개에서 침낭으로 몸을 감싼 채 한 시간 이상 동트기를 기다렸다. 정말 추웠다. 온몸이 차디 찬 땅바닥으로 가라앉는 느낌이었다. 더는 견디기 힘들 만큼 돼서야 비로소 동이 텄다. 더 이상 어둡지도 밝지도 않은 바로 그 아슴프레한 순간에 한 장의 사진을 남겼다. 찍은 것은 언덕 위에 길게 늘어선 순례자들의 철동상이었지만 정작 진짜로 찍힌 것은 나 자신의 마음바닥이었다. 그 순간 나와 순례자들의 철동상도 하나가 됐다.



40일 넘게 절대고독 속에 홀로 걸은 산티아고 가는 길은 누구와 경쟁하며 가는 길이 아니다. 여럿이 함께 가든 혼자 가든 자아를 찾아가는 고독한 길이다. 고독은 사람을 숙성시킨다. 마치 산티아고 가는 길을 걸으며 즐겨 먹었던 하몽처럼! 그것은 아마도 내 인생에 두 번 다시 만들기 힘든 거대한 고독의 시·공간이리라.


 


그 안으로 들어가자 보이지 않던 것이 보이기 시작했고 들리지 않던 것들이 들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자기 마음의 가장 밑바닥이 드러났다. 그런 가운데 가족의 소중함과 기본의 절실함을 그 어느 때보다 절감했다.


 


진짜 소중한 것은 가장 밑바닥에 있었다. 산티아고 가는 길은 높고 높은 교회의 첨탑으로 오르는 것이 아니라 낮고 낮은 바닥으로, 그 가장 밑바닥까지 내려가는 길이었다. 그리고 그 밑바닥에 진짜 소중한 것이 있음을 발견하는 과정이었다.



나는 다시 산티아고를 떠나 스페인의 땅끝마을 피니스테레를 향해간다. 말 뜻 그대로 거기는 종점이다. 삶에서 최고의 매력은 끝까지 하는 것이다. 이기고 지는 것이 따로 없다. 끝까지 하면 모두 이기는 거다.


 


(중앙일보, 2012.06.02)